인터뷰: 서체 디자이너 윤민구 님

Adobe Fonts 한글 폰트 릴리스 기념 시리즈 아티클

이 시리즈 아티클은 2020년 Adobe Fonts 에 많은 한글 폰트가 추가됨으로써 기존에 Adobe Fonts 에 있던 라틴 폰트와 새로 추가된 한글 폰트의 섞어짜기를 여러분이 더욱 즐길 수 있도록 제공하는 폰트 페어링 정보 아티클입니다. 

이번 아티클에서는 특별한 손님을 모셔 이야기를 듣도록 하겠습니다.

 

[민영]  안녕하세요! 오늘은 이렇게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선 간단히 자기소개 부탁드려도 될까요? 

[민구]  안녕하세요. 서체 디자이너 윤민구입니다. 현재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어요. 대학교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한 뒤, 안그라픽스 타이포그라피연구소에서 일했습니다. 이후 스위스 로잔 예술대학교(ECAL)에서 한글과 라틴 알파벳을 함께 디자인하는 바이 스크립트 타입 디자인에 관한 연구로 석사과정을 마쳤어요. 윤슬체, 윤슬바탕체, 블랑 등 다양한 서체를 디자인했고, 스위스 타입 파운더리*1 Dinamo와 함께 협업한 파보리트 한글, 그리고 을유문화사의 전용 서체인 을유1945 등을 디자인했습니다. 현재는 대학교에서 서체 디자인을 가르치며, 국내외 다양한 브랜드와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www.yoonmingoo.net

*1  타입 파운더리: 디지털 폰트 제작 및 관련 사업을 하는 회사를 뜻함.

mingoo favorit Hangul
«파보리트 한글, 2019» “파보리트 한글”은 스위스의 타입 파운더리 디나모 Dinamo가 2013년 출시한 “Favorit”의 한글을 제안받아 디자인한 산세리프 글자체이다. Favorit의 특징인 적은 획 대비, 관통 모양의 외형, 기하학적 구성과 같은 미묘한 DNA를 한글이라는 문자 형태에 새롭게 적용했다. www.abcdinamo.com

Mingoo Eulyou1945
«을유1945, 2020» 을유1945는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을유문화사의 법고창신(法古創新) 정신을 잇는 글자체로, 을유문화사의 옛 책에서 수집한 한자 명조의 삼각형꼴 맺음을 한글 해서 명조의 뼈대에 적용하여 새롭게 재해석했다.

한글 폰트를 제작하면서 조화로운 라틴 알파벳을 디자인 하는 것.

[민영]  민구 님께서는 해외에서도 서체 디자인 공부를 하시면서 한글 이외의 글자 디자인에 대해서도 배우셨는데요, 한글 폰트를 디자인하면서도 빠질 수 없는 게 라틴 알파벳인데, 한글과 너무나 다른 구조를 가진 라틴 알파벳을 조화롭게 만드는 것에 관해서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또한, 그렇게 열심히 만든 라틴 알파벳을 결국 쓰지 않고 합성글꼴로 다른 라틴 폰트와 섞어 짜기 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민구]  최근 한글 폰트의 질이 점점 좋아지면서, 한글 폰트 안에 포함되는 다국어 문자 디자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과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이전의 한글 폰트에 들어있던 라틴 알파벳의 디자인은 엉성한 부분이 많았기에, 말씀하신 것처럼  조판할 때에는 잘 만들어진 라틴 알파벳 서체와 한글을 섞어짜기하는 게 기본적인 룰로 여겨졌죠. 하지만 지금 한국 서체 디자이너들은 한글 디자인만큼 수준 높은 라틴 알파벳을 디자인하는 데 큰 노력을 쏟고 있습니다.

한글과 조화로운 라틴 알파벳을 디자인하는 것은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 같아요. 어느 정도 명확한 디자인 가이드를 가진 라틴 알파벳 디자인의 컨셉에 적당히 한글의 구조를 적용하면 우리는 그리 어렵지 않게 조화로움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항상 디자인은 모두가 예상하는 것 그 이상을 고민하는 학문이잖아요. 서로 다른 두 가지 문자의 타고난 형태를 존중하면서 동시에 개성과 완성도, 혹은 보는 글자와 읽는 글자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지점을 찾아내는 것이 꽤 지난한 작업입니다.

 

[민영]  한글 폰트 내 라틴 폰트도 다들 열심히 만들었을 텐데, 굳이 다른 라틴 폰트와 맞추는 것에 의미는 있을까요?

[민구]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초기 한글 폰트에 들어있던 라틴 알파벳은 디자인 퀄리티가 썩 좋지 않았습니다. 많은 디자이너는 위와 같은 이유로 섞어 짜기 기능을 권장하고, 또 학교에서 기본적으로 좋은 섞어 짜기 작업을 타이포그래피의 기초로 배웠죠.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한국 서체 디자인의 수준이 높아지고, 외국에서 수학한 한국 서체 디자이너들이 많아지면서, 전체적으로 한글 폰트 안의 라틴 알파벳 디자인 퀄리티가 매우 높아졌어요. “제대로” 그린 라틴 알파벳 디자인이 한글 폰트에 포함된 것이죠. 이제 섞어 짜기의 용도는 단순히 좋은 라틴 알파벳과 한글을 말 그대로 “섞는 것”을 넘어, 타이포그래피 자체에 성격과 표정, 개성을 부여하는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게 되었습니다. 기본적으로 가장 잘 어울리는 섞어 짜기 방법은 기본 폰트 안의 한글과 좋은 라틴 알파벳 디자인을 그대로 쓰는 것이 될테고, 섞어짜기는 좀 더 디자이너의 개인적인 미적 취향을 드러내는 용도로 사용하게 된 것이죠. 이제는 기본적으로 단순히 한글과 라틴 알파벳을 어울리게 한다기보다, “어떻게 하면 더 다양하고 풍부한 타이포그래피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하느냐”가 지금의 섞어 짜기 혹은 합성글꼴의 중요한 목적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민영]  공감합니다. 지금까지는 조금이라도 더 읽기 편하게 하기 위한 섞어 짜기였다면, 이제부터는 조금 더 개성적이고 다양한 디자인의 일관으로써 섞어 짜기를 시도하는 경향이 더 강해졌다고 저도 생각합니다. 그러한 흐름의 하나인지, 요즘 일부러 한글과 디자인이 매우 다른 라틴 폰트를 맞추는 것이 한국 내 유행이라 들었습니다. 실제론 어떤가요? 

[민구]  네. 최근에 많이 보고있습니다. 한글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다른 스타일의 라틴 알파벳 혹은 한자, 가나문자*2 를 섞어 짜는 경우가 많아졌어요. 개인적으로는 그러한 다양한 문자 스타일이 어울려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 매우 즐겁습니다. 우리가 타인에게 하나의 미적 기준을 강요할 수 없는 것처럼, 단순히 “비슷해” 보이는 스타일로 모든 나라의 문자를 조판하는 것이 “좋다”는 시대는 지나갔다고 생각해요. 서로 다양한 개성을 가진 문자들이 적절히 어울리고, 또 가끔은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며 대립할 수도 있는 타이포그래피가 건강한 시각적 즐거움을 선사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특정한 폰트만 사용하는 것이아니라, 디자이너들이 무의식중에 기피하던 스타일을 과감하게 시도한다거나 혹은 다양한 문자와 서체들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습을 지금 한국 디자인계에서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2 가나문자: 히라가나, 카타카나 등의 일본어 문자를 뜻함.

Mingoo Yoonseul chae
«윤슬체, 2013» “윤슬체”는 붓으로 쓴 두꺼운 줄기와 획을 갖는 세리프 계열 글자체이다. 일본 에도문자 스타일 중 하나인 ‘스모 문자’에서 영감을 받아, 큰 붓을 도구로 한 글자의 형태에서 줄기와 획이 극도로 두꺼워졌을 때, 한글의 조형적 특징을 살리는 동시에, 가독성을 위한 속공간의 형태 및 배치 등을 세심히 고려해 설계했다.

Mingoo Yoonseul Batang
«윤슬바탕체, 2018» “윤슬바탕체”는 단정한 획과 날렵하게 뻗은 이음줄기가 특징인 명조 글꼴이다. 가는 붓을 쓰기 도구로 한 표정에, 굵기와 회색도를 조절해 긴 호흡의 글에도 쓰일 수 있도록 했다. 붓으로 쓴 글씨 형태를 그래픽으로 가공하고, 획이 가늘어지고 크기가 작아질 때 약해지는 붓글씨의 특징을 강조했다.

새로운 폰트와의 만남에 대해.

[민영]  직접 폰트도 만드시고 많은 폰트를 접하실 텐데, 새로운 폰트를 다시금 찾아볼 때도 있으신가요? 혹은 항상 쓰던 걸 자주 쓰게 되나요? 

[민구]  실제 편집 디자인 작업을 할 땐 이미 익숙하거나 많이 써왔던 서체를 다시 쓰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물론 새로운 폰트를 찾아볼 때도 종종 있어요. 저는 자주 방문하는 몇몇 파운더리 웹사이트를 제외하고는 새로운 폰트를 찾아내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을 쏟는 편은 아닙니다. 저 자신이 서체 디자이너이다 보니, 필요하다면 보통 제가 직접 그려서 사용합니다. 폰트를 찾을 때도, 이미 다양한 스타일이 포진된 라틴 알파벳 폰트를 먼저 참고하는 편인 것 같아요. 웬만한 한글 폰트는 이미 거의 다 알고 있기도 하고, 보통 한글 영역은 제가 그리는 편이라 그런 듯합니다.

 

서체 디자인을 가르치는 것.

[민영]  민구 님은 현재 대학교에서 타입 디자인 수업을 가르치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민구 님 스스로 대학원에서 모국어가 아닌 글자들을 디자인하는 경험을 하셨을 텐데요, 한국 대학에서 가르치실 때도 한국어 이외의 언어 (라틴 포함) 타입 디자인을 가르친 적은 있나요? 수업 안에서 그러한 제2, 3언어를 디자인하는 기회가 있나요?

[민구]  석사과정에서 한글과 라틴을 동시에 디자인하는 것을 공부했기 때문에, 제 수업도 한글과 라틴 알파벳을 동시에 디자인하는 것을 기본으로 합니다. 특히 중국인 학생 같은 경우, 라틴 알파벳 디자인 과제를 한자로 대체할 수 있게 했고, 일본인 학생의 경우 가나 문자를 함께 작업하도록, 프랑스 학생의 경우에도 프랑스어 문자를 포함하는 라틴 알파벳 한 벌을 함께 디자인하도록 권장했습니다. 수업 중 필요한 경우, 해당 문자를 다루는 전문 디자이너를 온라인으로 초대해 외부 감수 의견을 받을 수 있는 시간도 별도로 만들었어요. 기본적으로 자신의 모국어 문자를 디자이너의 눈으로 새롭게 다시 돌아보는 것이 멀티 스크립트 타입 디자인*3 을 공부하는 가장 좋은 시작점이 되리라 믿습니다.


*3 멀티 스크립트 타입 디자인: 다양한 문자(언어)가 서포트 되는 폰트 혹은 폰트 패밀리를 디자인하는 것을 뜻함.

mingoo unir

mingoo unir
«유니어 Unir» 유니어는 ECAL 석사과정에서 “한국어 및 라틴 알파벳 바이 스크립트 서체 디자인에 관한 연구”를 바탕으로 설계한 세리프 서체 가족이다. 작은 크기로 쓰이는 긴 호흡의 텍스트를 위해 디자인했으며, 서양의 트랜지셔널 양식을 기반으로 하면서 동시에 더 모던하고 새로운 인상을 지니고 있다. HL/T/L/M/SB/B, 6종으로 가족을 이룬다.

[민영]  가르치는 내용뿐만 아니라 학생들도 다문화라서 서로 배우는 게 정말 많을 것 같아요. 하지만 그만큼 가르치는 입장에서도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수업할 때 어려움 등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민구]  주로 저학년 수업의 경우는 폰트 디자인 자체에 낯선 경우가 많았어요. 단순히 폰트를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를 포함해, 글자의 각 명칭이나, 세부 요소들이 전체 타이포그래피에 어떤 인상을 만드는지, 영향을 주는지 같은 디테일한 고민을 처음부터 함께 해야 하더라고요. 좋은 디자인은 좋은 눈을 갖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학생들에게 다양한 폰트를 많이 찾아보고, 써보고, 형태에 대해 고민할 것을 주문합니다. 강의를 하면서 흥미로웠던 점은, 지금의 학생들은 다양한 문자를 섞어 쓰는 것에 익숙하다는 점이었어요. 특히 한글과 완전 다른 성격을 가진 라틴 알파벳조차 어릴 때부터 친숙하게 보고 써온 문자이기 때문에, 디자인의 소재로 만나더라도 크게 낯설게 느끼지 않았습니다.

 

앞으로에 대해서.

[민영]  오늘 많은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통틀어 현재 한글 폰트 업계에 있어서 부족한 점이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민구]  더 다양한 스타일의 한글 폰트가 개발되었으면 한다는 점은 너무나 기본적인 내용이라 생략하고요. 더 나아가 저는 한글 폰트를 문화적으로 더 열린 마음으로 보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한글”은 아름답고 우수한 한국의 문화유산이라고 교과서처럼 외우고 있는 한국인(디자이너를 포함해)이 많은 것 같아요. 당연하지만 한글을 포함한 모든 문자는 평등하고, 다 다른 저마다의 형태적 아름다움을 갖고 있습니다. 중요한 건 그 안에서 한글만이 왜 아름다운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다른 문자들과 함께 어울리며,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하는 것 같아요.

 

[민영]  마지막으로, 서체 디자이너, 그래픽 디자이너로써 지향하고 싶은 점이 있으면 알려주세요. 

[민구]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서체 디자이너가 되고 싶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서체 디자인으로 돈도 많이 벌고 싶었고요. 그렇게 서체 디자인에만 몰두했더니 다른 많은 것을 보지 못하고, 놓치며 지나온 게 많았습니다. 서체 디자인에서도 ‘가’라는 글자만 그리다 보면 다른 ‘힣’이라는 글자와의 어울림을 놓치는 실수를 범하기도 하는 것처럼요. 결국 더 크고 넓게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삶도 그런것 같아요. 지금은 서체 디자인이 그냥 제 삶을 대하는 좋은 태도 중 하나이길 바랍니다. 조금 무책임해 보일 수는 있지만, 좋은 태도로 그렸기 때문에 좋은 글자가 나오기를 바라요. 태도는 사실 어디에든 적용되는 것이잖아요. 디자인이건, 삶이건, 글자건, 인간관계건. 그래서 더 나은 사람이 되어 더 좋은 태도로 디자인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터뷰에 응해주신 윤민구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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